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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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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팔레스타인 1936
정가 ₩28,000
판매가 ₩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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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위즈덤하우스
ISBN 9791171711857
출간일 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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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팔레스타인인이 승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순간이자
오늘의 분쟁이 시작된 1936~1939년 아랍 대봉기
그 3년의 고난을 재현하다


많은 사람이 중동분쟁을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나크바(Nakba, 대재앙)에서 기인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간 팔레스타인에서 지속된 아랍 대봉기가 그 출발점이다. 1936년 봄,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 공동체와 20년 동안 시온주의 프로젝트를 산파했던 영국 위임통치 당국을 겨냥한 봉기가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어난 이 아랍 대봉기(Great Revolt)는 유대인, 영국인, 그리고 아랍인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오늘날 우리가 ‘중동분쟁’이라 부르는 사건 또한 이때 본격화되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대봉기는 민족적 정체성이 하나로 모였던 최초의 시기였다. 경쟁 관계의 가문,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할 것 없이 모두 독립을 위한 단일 투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봉기는 내전으로 비화되는 동시에 영국의 공격적인 진압, 시온주의자들의 반격으로 아랍 팔레스타인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인의 전투력은 무력화됐고, 경제는 초토화됐으며,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고, 유력 정치 지도자들은 추방됐다. 시온주의 종식을 목표로 시작된 대봉기는 오히려 아랍인들을 처절하게 분열시켰다. 이 때문에 그들은 10년 후 유대인의 이스라엘 건설에 맞설 수 없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아랍 대봉기는 완전히 다른 유산을 남겼다. 대봉기를 목도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아랍이 유대 국가 건설을 용인해주리란 환상을 버렸다. 주권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원히 무력에 기대야 할지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봉기로 인해 수천 명의 유대인이 당대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던 영국에 의해 훈련받고 무기를 지급받았다. 어설펐던 경비대는 강력한 유대인 군대의 씨앗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대학살과 히틀러의 위협 속에서 ‘분할’ ‘유대 국가’와 같은 불길한 단어가 처음으로 국제 외교 의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5년간 3개 대륙과 3개 언어를 넘나든 광범위한 기록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니라 아랍, 유대, 그리고 영국 세력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주요 인물들의 행동과 판단을 따라가며 서술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역사의 장면을 통해서 아랍 대봉기 과정뿐 아니라 오늘날 중동분쟁의 패턴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목차

등장인물 7
들어가는 글:역사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대봉기 11

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21

신실한 소년 27│위임통치령의 탄생 33│팔레스타인의 잔혹한 봄 38│무프티 중의 무프티 42│평온한 나날들 47│고통의 나날들 50│벽은 우리의 것이다! 54│히틀러와 뜻을 같이하다 63│무사 얘기는 다르던데? 67

2장 피로 물든 야파 83

장작 패고 물 긷는 노예 91│테살로니키에서 온 남자 95│굉장한 도덕적힘 105│파업과 반격 112│동방에서 온 세 명의 왕 130

3장 두 국가 해법론 137

위원회, 항해를 떠나다 143│생각을 바꾼 대무프티 153│관개전문가의 등장 160│억누를 수 없는 갈등 173│예상치 못한 반향 181│두 총회 이야기 188

4장 검은 일요일 193

신의 선물 201│오직 이를 통해서만 209│불안한 운명 218│뒷걸음질 225

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233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242│에덴동산 246│완벽한 대가관계 251│죽음이라는 특권 262│무법이 곧 법이다 276

6장 유대의 로렌스 283

사실의 논리 291│시온의 군대 299│9월의 두 주 318│디베랴와 타바리야 319│대무프티의 미소 324│다시, 필 330

7장 불타는 땅 339

자유 팔레스타인은 가능할까 350│3인방의 죽음 368│흩어진 마음 374│라헬, 내 민족을 사랑하는 384│다시 만납시다 387

마치는 글: 끝나지 않은 봉기 392
감사의 말 426
참고문헌 506
주 428
찾아보기 518

저자소개

오렌 케슬러 , 정영은

출판사리뷰

★★《월스트리트저널》 선정 올해의 책★★
★★《북리스트》 Editors’ Choice 선정 도서★★
★★아랍 대봉기를 조명한 최초의 책★★

“아랍-유대 간의 투쟁 방식과 대응 논리를 치밀하게
재구성함으로써 분쟁 해결에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책”
-이희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현대적 분쟁의 시작
아랍 대봉기는 어떻게 일어났나


1934년 11월 아랍의 비밀결사 검은 손(Black Hand)의 설립자이자 이맘인 이즈 알 딘 알 카삼이 팔레스타인 경찰에 의해 사망한다. 대규모 유대인 이민을 허가한 영국과 무장을 시작한 시온주의자들에 맞서 투쟁했던 알 카삼의 죽음은 팔레스타인 내 아랍과 유대 양측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말처럼, 아랍인은 그 사건을 통해 “한 인간이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그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인에게 ‘도덕적 동력’을 부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6년 4월 15일 텔아비브 야파에서 유대인 가금류 업자 하잔(Israel Hazan)이 아랍인들의 총격에 목숨을 잃는다. 총격을 가한 이들은 ‘알 카삼’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기를 사야 한다며 기부금을 요구했고, 그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총을 쐈다. 하잔은 1936년에 시작된 아랍 대봉기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1930년대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민족 국가 건설 계획에 치명적인 위협을 마주한 상황이었다. 일단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영국-유대 간의 밸푸어 선언(1917)에도 소수를 유지하던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한다. 4년 만에 2배 증가해 1937년 약 40만 명이 된 유대인은 이제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 토지 매입도 급격히 늘어 1935년 유대인의 토지 매매 건수와 면적 모두 2배가 된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 정착촌과 키부츠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전 세계적인 불황에서도 유대인이 지배하는 은행업, 산업, 건설업 부문은 번창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내에서 정착촌을 지키는 무장단체 하가나, 노동조합연맹 히스타드루트, 유대인 경찰 노트림, 토지를 사들이는 유대민족기금, 임시정부인 유대인기구를 설립하는 등 이미 강력한 국가적 조직을 확립한 터였다. 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이에 대응할 만한 조직이 거의 없었다. 양질의 일자리는 유대인이 장악했다. 이라크가 독립을 승인받고(1932), 시리아가 50일에 걸친 총파업 끝에 프랑스 철수 협상(1936)이 시작됐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랍인이 참여하는 입법의회조차 친시온주의 영국 정치가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 카삼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이스티클랄, Istiqlal)을 향한 열망, 그것도 무력 쟁취의 불씨를 당겼다. 알 카삼에 대한 복수, 독립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단 신념, 실질적 위협이 된 유대인으로 말미암은 아랍 대봉기는 시위와 불매운동, 공공시설 파괴, 게릴라전, 그리고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6개월간의 총파업을 포함해 3년간 지속된다.

아랍-유대 간의 투쟁 방식과 대응 논리의 기원을
치밀하게 재구성하다


현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서안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분리 장벽’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뱀처럼 똬리를 튼 이 장벽은 2002년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저자는 그 유래를 아랍 대봉기 진압을 위해 건설된 테거트 장벽(Tegart’s Wall)으로 본다. 1938년 경찰 자문관으로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찰스 테거트 경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무장세력 침투를 막기 위해 국경에 철조망 울타리와 요새 건설을 계획한다. 자금 부족을 이유로 정부의 반대에 부딪힌 그에게 동아줄이 되어준 건 유대인들이었다. 시온주의 노동 지도부는 테거트의 요청에 1000명의 인력으로 3개월 안에 장벽을 완성시킨다. 시온주의자들에게 이 장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장벽의 위력을 확인한 것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치안 유지에 유대인이 공식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성과였기 때문이다. 장벽뿐 아니라 현재 이스라엘 군대가 시행하는 행정 구금 역시 대봉기 당시 영국 경찰이 용의자들을 구금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붙잡고 그 집을 철거하는 것 역시 위임통치 시기 영국이 쓰던 수법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또한 대봉기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시위, 공공시설 파괴, 게릴라전과 총파업도 그렇지만, 오늘날 범아랍권으로 널리 퍼진 이스라엘 불매운동은 대봉기 기간 내내 지속했던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과 유대인 손님에 대한 판매거부운동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방식이다. 1987년 결성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정당이자 무장단체인 하마스는 자신들의 군사조직에 대봉기를 촉발한 알 카삼의 이름을 붙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오스만식 페즈 모자를 벗고 아랍 무장투쟁의 상징인 체크무늬 케피예(머리에 두르는 아랍 전통 스카프)를 착용한 것도 대봉기 시기 아랍국가위원회의 지시에서 시작되었다.

저자는 아랍 대 유대 민족주의 충돌, 서로를 향한 공격과 대응을 치밀하게 재구성하면서도 ‘서술식 역사서’답게 유려한 이야기로 독자를 이끈다. 연대기가 아니라 현장감이 느껴지는 1936~1939년 팔레스타인의 시공간 속에서 독자들은 오늘날 아랍-유대 간의 투쟁 방식과 대응 논리의 원천을 파악할 수 있다.

맥마흔 선언 VS 밸푸어 선언
최대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말을 뒤집는 영국


맥마흔 선언과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약, 밸푸어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영국의 목표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벌어지는 소요사태는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그때마다 영국은 국제연맹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중의 의무, 즉 “위임통치령이 비유대인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기 위해서 각종 조사위원회를 꾸리고 백서를 발표한다. 실상은 그럴듯한 약속으로 아랍의 민심 달래기에 불과했고, 곧바로 무효화되기 일쑤였지만 영국은 위임통치 종료 때까지 이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1년 야파에서 벌어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식민장관 처칠이 발표한 〈처칠 백서〉, 1929년 8월, 예루살렘을 비롯해 20여 개 지역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의 대책 마련을 위해 발표한 〈호프 심프슨 보고서〉와 〈패스필드 백서〉는 모두 유대인 이민 허용치에 대한 제재를 약속했다. 그러나 시온주의 측의 로비와 홍보 총력전에 1931년 로이즈 조지 총리는 ‘대규모 유대인 이민은 계속’될 것이라는 일명 “검은 편지(Black Letter)”를 발표함으로써 이를 무효화한다. 이렇듯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대개 ‘맥마흔 선언-밸푸어 선언’ 패턴의 반복이었지만, 1937년 ‘필 왕립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47년 국제연합 분할안, 클린턴 대통령의 클린턴 초안, 트럼프 대통령의 “세기의 거래” 그리고 바이든 정부의 공식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할안’의 원전 격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1936년 아랍 대봉기 발발 후 파견된 필 위원회의 조사 과정을 유대와 아랍 측의 증언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바이츠만(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을 비롯한 유대 측과 하지 아민(아랍고등위원회 창설자)과 같은 아랍 측 대표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른바 ‘두 국가 해법론’이 어떻게 제시됐는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유대 국가, 아랍 국가, 영국 관리 구역으로 팔레스타인을 나누는 이 제안을 일컬어 위원회는 “깔끔한 분할(clean cut)”이라고 자평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유대인 증인 수, 시온주의자들의 로비 등으로 인구 대비 분할 면적뿐 아니라 위치 자체도 이미 시온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랍 측은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고, 유대 측은 ‘유대 국가’는 받아들이되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선은 거부하자고 협의한다. 대봉기를 잠재우기 위해 영국이 제시한 대책은 유혈사태를 잠재우기는커녕 봉기에 다시 불을 붙인다. 다시 영국은 〈우드헤드 위원회 보고서〉(1938)로 분할안 폐기를 권고하고 〈맥도널드 백서〉(1939)에서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약속하는 등 말을 바꾸지만, 아랍 땅에 100년간 계속될 분쟁의 씨앗을 남긴 채 곧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대봉기가 진압당한 후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1939년 아랍 대봉기는 아랍에만 8000명의 사망자, 2만 명의 중상자, 4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키며 영국군에 의해 진압됐다. 대봉기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그야말로 회복 불능 상태가 됐다. 지주들은 피난을 떠나고 농민들이 수천 명에 달하는 무장세력의 식량과 자금을 대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농작물은 모두 말라버렸다. 세수가 감소하고 정부에서 일하던 아랍인 수천 명이 충성을 의심받으며 직장을 잃었다. 아랍인 마을에서는 대봉기 기간 내내 비공식적으로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과 유대인 손님에 대한 판매거부운동이 이어졌는데, 이 또한 아랍 상인들의 수입이 크게 줄어든 원인이 됐다. 한때 야파 항구를 통과했던 화물의 절반이 이제 유대인의 항구인 텔아비브로 갔다. 하지만 경제의 초토화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민족적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봉기를 계기로 아랍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추방당했고, 대봉기를 진두지휘했던 아랍의 전사들 또한 영국에 의해 대부분 사망했다. 8000명의 아랍인 사망자 중 1500명이 같은 아랍인에 의해 살해당했을 만큼 내분 또한 심했다. 이런 상태에서 10년 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나크바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유대 진영에도 500여 명의 사망자와 1000명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은 대봉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3년간 단 한 곳의 정착촌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벽과 탑’ 사업으로 전략적 요충지에 60개의 정착촌을 추가로 건설했다. 아랍의 유대인 불매운동은 오히려 ‘자급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유대인 농업과 산업을 만드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됐다. 시온주의 금속 산업과 무기 산업이 등장하면서 지뢰와 수류탄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곧 박격포와 폭탄의 생산까지 가능해졌다. 정착촌을 지키는 무장단체 하가나는 영국에 의해 대대적인 훈련과 무기를 지원받아 영국의 팔레스타인 치안 유지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건국 후 이들은 이스라엘방위군의 핵심이 되었다.

1936~1939년에 일어난 대봉기는 시온주의자들의 역사에서도, 아랍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를 유대인 자결권을 위한 투쟁으로만 볼 뿐 타인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행위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봉기는 그저 자신들의 위대한 건국 신화의 방해물일 뿐이었다. 아랍인들은 대봉기에서 교훈을 얻지 않았다. 나크바에 집중함으로써 작금의 상황에 대한 탓을 시온주의자나 주변 아랍 국가들,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돌렸다. 저자가 5년간 3개 대륙의 20개의 기록보관소를 넘나들며 아랍 대봉기를 재구성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과거를 정확히 알 때 얽히고설킨 실타래의 첫 매듭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도 이스라엘에서는 90년째 아랍 대봉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 평화는 찾아올 것인가. 이 책이 시급하고 시의적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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